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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 전쟁 배경 및 전쟁 과정

카테고리 없음 by 정보 매거진 2023. 12. 4.

고려-거란 전쟁은 993년, 1010년, 1018년(혹은 1019) 고려와 거란의 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빈번했습니다. 특히 거란과 고려의 제3차 전쟁은 한국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미쳤습니다. 993년(성종 12) 10월 소손녕(,10孫寧)의 침입, 1010년(현종 1) 11월 소손녕의 목종살해죄를 구실로 요 성종(宗聖宗)의 직접 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과의 3차 대전쟁과 1015년 소적렬(昭赤烈)의 흥화진(興化鎭) 내침(內侵) 등을 통틀어 말합니다. 

고려-거란 전쟁 배경 및 전쟁 과정
고려-거란 전쟁 배경 및 전쟁 과정

 

1. 전쟁 배경

거란과 관련된 것은 고구려 때부터였지만 특히 고려시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거란도 부족분단 상태에서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 지역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에 요나라를 건국했습니다. 922년(태조 5)에는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거란에 대해 '금수의 나라'라고 부르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북진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마리를 보내자 고려 태조는 30명의 사신을 섬으로 유배시켰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어 죽였습니다.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이후에도 고려 정종 때 광군 30만 명을 양성하였고, 광종 때에는 서북쪽에 맹산, 숙천, 박천, 문산 등 청천강 유역, 동북쪽에는 영흥, 고원 등지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갖추고 광군을 광군사로 개편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된 후 송과 화친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한편 979년 통일을 이룬 송나라는 985년(성종 4) 고려에 송나라 사신인 감찰어사 한국화를 보내 협공을 제의했습니다. 또한 송나라는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 유민의 독립국가인 정안국과 해상을 통해 왕래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란은 고려의 움직임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요 태종은 5대의 첫 후량과 후당의 싸움에 개입하여 연운십육주를 얻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결국 중국 남침에서 패배한 후 급사하고, 수구파와 진보파의 대립과 정쟁으로 고려와 겨룰 여유가 없었으나, 982년 이후 정국은 안정되었습니다. 요 성종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후, 991년 위구, 진화, 내원 등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를 침공하려 했습니다.

 

2. 전쟁과정

1) 제1차 고려-거란 전쟁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은 19993년(성종 12) 10월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약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전쟁입니다.

 

993년 5월과 8월 두 차례 압록강 부근의 여진으로부터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다는 통고가 있었고, 10월 소손녕의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 박양유서희 등을 보내 이를 저지하는 한편, 성종은 직접 안북부로 가서 전선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황해북도 봉산군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붙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갔고, 조정은 이몽전을 청화사로 삼아 내침의 진의를 떠보았지만 소손녕은 항복을 요구했을 뿐 명분 없는 침입이었습니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임금께서 서울 대궐로 돌아가 중신들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항복해야 한다"(항복론)와 "서경 이북 땅을 떼어 거란에게 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할지론),  등의 의견이 나오면서 할지론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희와 이지백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자 성종도 이에 따랐습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는데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의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서희를 급히 보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게 했습니다.

 

고려는 동여진을 축출하고 흥화진, 통주, 구주, 곽주, 용주, 철주 등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끊고 요나라와 교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들어 침공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이지만 송나라와 교류를 계속했고, 요나라 역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의 압박에 큰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다시 침략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압록강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닌 베이징 서남부, 흥화진과 강동 6주는 석가장 북서쪽의 태행산맥, 거란은 대동시 서북쪽에 있었습니다. 여기 고려사 원문에서의 해는 바다가 아니라 황하를 뜻합니다. 당시 해는 바다가 아닌 큰 물, 배를 타고 건너는 강이나 큰 호수를 해로 표기했습니다.

 

2)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김치양이 혼외관계를 맺어 목종을 대신해 그들의 혼외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숙청하자 홧김에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 왕순을 옹립한 후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이를 강조정변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이 정변을 빌미로 강조의 죄를 묻겠다며 40만 대군을 일으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이 침략한 진짜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막고, 고려와 거란의 관계를 재확인하여 강동 6주를 다시 탈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의 항전으로 함락되지 못했습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임명하여 30만 군사를 이끌고 통주(通州)로 가서 막게 했으나 크게 패하고 요 성종은 강조를 붙잡아 죽였습니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으나,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급급하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남겨 두었기 때문에 병참선이 끊겼습니다. 고려가 하공진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은 친조를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돌아가는 길에 구주 등지에서 양규와 김숙흥 등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3)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거란에 친조 하지 않고 강동 6주를 반환하라는 요구에 응하지도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단교하고 이듬해 송나라와 다시 교류했고,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에 고려는 서북면 행영도통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여 20만 대군으로 대응하였습니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기병 1만 2천여 명을 골짜기에 매복시켜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 개울물을 막았는데, 적병이 도착하자마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지만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연이은 공격을 피해 개경으로 향했으나 자주(평안남도 순천시)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고 고려군의 청야 전술도 식량 공급에 큰 차질을 빚었습니다. 소배압은 이듬해 정월에 경을 떠나 멀지 않은 신은현(황해북도 신계군)에 도착하였으나 개경이 함락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습니다. 

강감찬은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한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하였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불렀습니다. 거란군 10만 명 중 생존자는 2천여 명에 불과합니다.

귀주대첩 묘사도
귀주대첩 묘사도

 

3. 전쟁 결과

1019년 전쟁이 끝나고 양국 간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습니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를 중지하고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되, 요나라가 요구한 임금 친조와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요나라가 고려를 침략하는데 실패하고 요동의 통치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니 고려가 존재하는 한 송나라로 쳐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고려-송(宋)-요(朝) 3국은 대등한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또 고려도 서북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고, 북진정책도 계속 추진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동시에 고려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까지 천리장성개경성을 쌓았습니다.

고려 천리장성
고려 천리장성



또한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간에 무역이나 밀무역 등이 성행하여 거란의 대장경이 전해져 의천의 속장경 간행에 영향을 미치거나 원효의 「기신론소」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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